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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남한강 ] 여주 5일장!!
등록일시 2019-06-17 오전 11:00:00

여주5일장은 남한강을 끼고 있는 여주에서 장이 서는 정기시장이다. 여주5일장의 장날은 5, 10일이며, 성남 모란장에 이어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여주5일장에서는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비롯해서 의류, 잡화 등 다양한 물품들이 판매된다.

분류 > 지역 경기 > 여주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여흥로57번길 20
시장 유형 정기시장(매월 5, 10일)
형성 시기 1983년
시장 현황 점포 수 600곳
특산물 쌀, 고구마, 배, 땅콩
먹을거리 올갱이국수, 쌀밥
같은 지역 다른 시장 제일시장, 가남시장, 대신시장
주변 볼거리 신륵사, 세종대왕릉, 목아박물관
전화번호 여주제일시장 상인회 031-885-4091

1. 여주5일장 개요

여주 지역은 남한강을 중심으로 발달해 온 곳이다. 수로 교통이 중심이던 조선시대에는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나루, 조포나루가 한강의 4대 나루로 꼽혔는데, 그중 이포나루와 조포나루가 여주에 속해 있을 만큼 수운을 통한 물류가 크게 발달했다. 이포나루와 조포나루에는 영월과 정선에서 올라오는 떼배와 충청과 강원으로 가는 소금배 등이 교차하며 지났고 황포돛배가 한 폭의 그림처럼 떠다녔다.

또한 여주와 이천에서만 생산되어 왕실에 진상했던 자채쌀도 재배되었고, 맑은 남한강에서는 민물고기가 풍부하게 잡혔다. 이렇게 물류와 특산물을 중심으로 여주 지역에는 일찍부터 시장이 개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한강의 나루를 중심으로 5곳에서 시장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수운이 쇠퇴하고 철도와 도로를 중심한 교통 체계로 변하면서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시장이 3곳으로 줄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때 11곳까지 시장이 늘어났지만 도시화 등의 이유로 시장이 줄어들었고, 오늘날 여주 지역에는 상설시장 1곳과 정기시장 3곳이 개설되어 있다. 여주 시내에서 열리는 여주5일장은 전국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정기시장으로 과거 번영했던 여주장의 명맥을 잇고 있다.

여주 시내 중심의 중앙로에서 열리는 여주5일장

여주 시내 중심의 중앙로에서 열리는 여주5일장

여주 중앙로에 들어선 노점들

여주 중앙로에 들어선 노점들

 
 

2. 여주5일장의 어원

여주 지역은 고구려 때 골내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757년에는 황효, 고려시대에는 황려, 여흥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예종 때 여주라는 이름이 생겼다. 여주의 이름에서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글자가 여(驪)이다. 여는 몸통이 검은 말을 의미한다. 여주5일장은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3. 여주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여주는 남한강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지역이다. 수로 교통이 물류의 중심이던 조선시대에 4대 나루로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나루, 조포나루가 꼽히는데, 이 가운데 이포나루와 조포나루가 여주에 속한 나루였다. 남한강을 통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물자들이 모두 여주의 나루를 거쳤기 때문이다. 이포나루는 양평으로 가는 여주 북쪽 금사면에 위치했고, 조포나루는 여주 신륵사 앞에 있었다.

특히 이포나루는 영월과 정선에서 뗏목을 만들어 한양으로 목재를 운반하던 떼꾼들이 탄 떼배, 반대 방향으로 소금을 싣고 가서 콩이나 담배와 바꾸었던 바꿈배, 사람들을 태우고 다녔던 황포돛배 등으로 늘 붐볐다.

황포돛배는 황토로 물을 들인 돛을 단 배를 가리킨다. 황포돛배가 한양의 마포에서 충북 지방의 단양이나 제천 등을 오가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장대 같은 긴 돛대에 누런 돛을 펼치고 바쁠 것이 없이 느린 속도로 물길을 오가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한양에서 여주까지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닷새 정도가 소요되었고, 여주에서 한양을 갈 때는 이틀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물길이 늘 편안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길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사납고 거칠게 변할 수 있었다. 수로는 육로보다 안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물자를 이동시킬 수 있기 때문에 수로를 활용했다.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남한강 일대에 많은 절터들이다. 오늘날 여주를 비롯한 남한강 일대에는 거돈사지, 법천사지, 고달사지, 청룡사지 등 많은 폐사지가 남아있다. 과거 남한강을 오갔던 많은 상인들이 물길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절에 많은 시주를 했기에, 남한강을 따라서 큰 절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이런 큰 절들이 폐사된 것은 물류가 수로에서 육로 중심으로 바뀌면서 상인들의 시주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절의 규모가 조금씩 약화되다가 끝내 폐사되고 말았다.

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이 발달한 것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100여 년 동안 왜구의 노략질로 바닷길이 위험해지면서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내륙의 수로가 한양과 중부 지역 사이의 동맥 역할을 하면서 정치와 경제의 중심 역할을 맡아 왔다.

그래서 남한강을 통해 수도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여주 지역의 강변에 시장이 세워지고, 강을 오가는 배들이 쉬어갈 수 있는 나루와 여각이 발달했다. 이들 시장에서 주로 거래되던 것은 배에 실려 오가던 소금과 새우젓, 어염, 건어물, 직물, 미곡, 콩, 참깨, 담배, 옹기, 임산물 등이었다.

한편 조선시대에 여주에서 생산된 특산물 또한 수로 교통을 통해 한양으로 전해졌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여주 지역의 특산물은 주로 남한강에서 잡히는 민물고기가 많았다. 그것은 남한강의 물이 맑고 바닥이 모래여서 여주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흙냄새가 나지 않고 단맛이 났기 때문이다. 특히 쏘가리와 잉어는 최고로 쳤다. 이 가운데에서도 최고는 남한강에서만 잡히는 금잉어였다.

또 하나 여주의 특산물은 쌀이었다. 여주쌀은 자채(自蔡)쌀이라고도 불리는데, 여주와 이천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왕실에 진상했던 자채쌀은 윤기가 자르르할 정도로 기름기가 많아 밥맛이 좋았다. 이 지역에서 자채쌀이 생산된 것은 토질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전국에서 쌀 생산이 많던 지역은 전라도의 전주와 김제, 만경 일대의 호남평야와 황해도의 연안과 봉산, 그리고 경기도의 여주와 이천이었다. 이 중 자채쌀은 여주와 이천에서만 생산되었다.

여주 지역에서는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 예부터 시장이 개설되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 따르면 당시 여주 지역에는 여주 읍내장(2, 7일), 청안리장(1, 6일), 억억교장(1, 6일), 대왕장(4, 9일), 곡수장(4, 9일, 대송면) 등 5곳에서 시장이 개설되어 있었다. 그러나 읍지에는 청안리장이 없고 대왕장의 장날이 3, 8일로 나와 있다.

중심 시장은 여주 읍내장이었다. 여주 읍내장은 섬강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부터 우천까지 여주 읍내장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평이나 이천 쪽으로도 소규모의 시장들이 형성되었다. 다만 이들 시장은 나루 중심이었기 때문에 정기시장의 형태를 띠지는 않았다. 그 중심이 된 나루는 이포나루였다. 이포나루에 정기시장이 형성된 것은 1909년의 자료에 처음으로 나타나지만 그 이전부터 시장이 개설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주장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유서가 깊은 시장이었다. 《여주군지》에는 조선시대에 여주에서 생산된 주요 공산품은 도자기와 창호지였고, 세종 연간에는 여주에 쌀 250석을 실을 수 있는 관선 15척과 개인 소유의 배가 20척 있었고, 병사가 150명 정도 주둔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여주장이 단지 여주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억억교장은 억억교라는 다리 주변에 개설되던 시장이었다. 억억교는 여주군 흥천면 복하천 제방 부근에 있었다. 억억교는 원래 억(億)다리라고 불렸는데, 어떤 장수가 놓았다는 의미에서 억억다리라고 불렸다. 이 다리 때문에 하천 옆에 마을이 생겼다. 억억교는 여주에서 서북쪽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했다. 양화역을 지나면 양평과 이천 방면으로, 서쪽으로는 광주로 갈 수 있는 도로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억억교장은 이런 지리적인 배경에서 생겨났다.

여주 지역에 개설된 시장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1827)에 따르면 18세기 후반과 비교했을 때 기존의 읍내장(주내장)과 억억교장, 곡수장이 그대로 존속했다. 그리고 청안리장과 대왕장이 소멸된 반면 신은천장(5, 10일), 궁리장(3, 8일)이 새로 개설되었다.

여주 읍내장은 관문 앞에서 장이 섰다. 억억교장은 길천면에 곡수장은 여주 북쪽의 대송면, 신은천장은 개군산면, 궁리장은 금사면에서 장이 섰다.

이들 시장의 특징은 모두 남한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길천면은 오늘날 능서면으로, 대송면은 대신면, 개군산면은 개군면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들 모두 남한강과 면하고 있는 지역들이다.

당시 여주 지역에 속한 남한강에 있던 유명한 나루는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를 빼고도 창남나루, 흔암나루, 우만이나루, 부라우나루, 상자포나루 등이 있었다.

충청도에서 남한강을 따라 여주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던 나루는 창남나루였다. 여주시 점동면 창말에 있던 창남나루는 조선시대에 큰 조창의 하나였던 원주 흥원창의 강 건너편에 있었다. 창말은 번성할 때는 인구가 100호 정도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나루 주변에는 창고와 술집, 주막, 장터, 면사무소 등이 위치했다. 창말은 지주들의 땅이 많아서 정기적으로 곡식의 작황을 점검하고, 여기서 생산된 쌀을 배를 통해 한양으로 운반했다.

역시 점동면 흔바위마을에 있던 흔암나루는 남한강 강변에 위치해 홍수 피해가 잦았다. 오늘날의 흔바위마을은 1972년 홍수 때 모든 가옥이 침수되어 집단으로 이주해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쌀과 소금이 흔암나루에 집산되어 마차를 통해 장호원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흔암나루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쇠락했다.

흔암나루에서 한양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나는 나루가 우만이나루였다. 우만이나루는 여주읍 우만이마을에 있던 나루로 오늘날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우만이나루가 사라진 것은 1972년의 대홍수 때였다.

그 이전까지는 20여 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가 있어 강 건너 강천면 사람들이 여주장에 갈 때 이용했고, 강천면의 땔감을 이동시키는 길목이기도 했다. 우만이나루는 남한강의 짐배나 떼배가 들르는 나루는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큰 나루인 조포나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포나루에 이르기 전에 있던 나루가 부라우나루였다. 부라우나루는 여주읍 단현리 부라우마을에 있던 나루로 인근에 명성황우 민비의 생가가 있는 민씨 집성촌이 자리하고 있었다. 부라우나루는 역시 강 건너의 강천면 주민들이 여주장으로 가기 위해 주로 이용했다.

부라우나루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배는 기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장수들이 원주장에서 소를 구입해서 여주장에 갈 때 이용했고, 가끔 소금배가 활용한 나루였다.

여주 지역의 북쪽에 있던 이포나루는 일제강점기 때 주변에 금광이 2군데 있어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당시 금광에서 일하는 인부만 200명 정도여서 이들을 상대로 하는 주막과 술집이 장터에 즐비했다고 한다. 이포장에서 거래된 물건은 여주와 이천, 양평까지 마차와 달구지로 운반되었다.

그런데 이런 수로 교통을 통한 지리적인 이점은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수로 교통이 물류의 중심이던 조선시대와 달리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른바 신작로라고 불리는 도로가 개설되고 대단위 물자의 수송이 가능한 철도가 부설되었기 때문이다. 남한강의 수로 교통을 중심으로 번영을 구가했던 여주의 상업은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여주를 지나는 수려선은 수원과 여주를 잇는 철도로 1931년에 개통되었다.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선과 만났기 때문에 결국 인천과 여주가 이어진 셈이다. 이 철도를 통해 여주와 이천 등지에서 생산된 쌀이 인천으로 보내졌다. 수려선이 폐지된 것은 1972년의 일이었다. 또한 1940년대에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수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물류가 완전히 철도 중심으로 변화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이런 교통의 변화 속에서 여주의 시장도 변화를 겪었다. 여주의 중심 시장이던 여주장은 1933년 기념 도로에서 개설되고 있었다. 그러나 도로에서 장이 섰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했고, 노점이었기 때문에 여름에 위생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비가 내릴 때마다 고객들이 피할 곳이 없고 비가 많이 오면 큰 피해를 입어 시장을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기념도로의 좌우편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은 이전을 반대해, 장날에 시장을 열지 않고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나 당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내면 하리 하우평광장으로 시장을 이전하기로 결정, 1934년 3만 9,670m2의 부지를 조성해 공사한 뒤 10월 30일에 시장을 이전했다.

그런데 1935년 8월 20일에 불어닥친 태풍이 새롭게 조성된 신설 시장을 덮쳐서 신설 점포 60칸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여주장은 태풍의 피해를 극복하고 다시 장이 새롭게 섰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여주에는 모두 3곳에서 장이 서고 있었다. 이런 수치는 과거에 비해서 줄어든 것으로, 교통의 변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여주 지역의 시장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 말 여주 지역에 개설된 정기시장 현황

 

1930년대 말 여주 지역에 개설된 정기시장 현황
시장 이름 소재지 장날 연 거래액(원)

여주읍내장

여주군 여주면 하리

5, 10일

213,630원

이포장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1, 6일

109,000원

태평리장

여주군 가남면 태평리

3, 8일

343,500원

자료: 《조선의 시장》 문정창, 1941년

위의 표에 보이는 이포장은 이포나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이었다. 이포나루는 단종이 유배 갈 때 광나루에서 출발해 가다가 이곳에서 잠시 내려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이포(梨浦)라는 말은 배가 닿는 나루라는 우리말인 배개를 한자로 표시한 것이다. 이포나루는 여주와 양평, 이천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세 지역의 물산이 집산되는 나루로 성장했다.

이포장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909년인데 그것은 일제강점기 때 여주와 양평에서 생산된 곡물들이 이포나루를 거쳐 인천으로 운반되던 것과 관련이 깊다. 이포나루는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왕래하며 나루 역할을 했지만 이포대교가 건설되면서 오랫동안 교통의 중심지로 각광받았던 이포나루는 역할을 상실하고 말았다.

한편 여주장은 1940년대까지도 주변의 원주와 이천, 장호원 등의 시장을 이끄는 중심 상권 역할을 했다. 그것은 과거의 수로 교통을 이용한 상업의 관습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여주장에서는 쌀과 메밀, 콩, 깨 등을 파는 곡물전이 가장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곡물전 주변에는 주막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러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과거 수로 교통의 이점을 상실하면서 여주 지역의 상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해방 이후에 대신장과 북내장, 주암장, 상품장 등의 시장이 개설되었지만 한국전쟁을 즈음해 모두 폐시되고 말았다.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1960년대에 들면서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시장이 활발하게 개설되는데, 여주 지역도 다르지 않아 1965년에는 11곳에서 시장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도시화로 인한 인구 감소로 인해 1976년에는 5개로 줄어들었다. 이런 현상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가속화되어서 오늘날 여주 지역에는 상설시장인 제일시장과 정기시장인 여주5일장, 가남시장, 대신시장 등 4곳에서 장이 개설되고 있다.

여주 지역은 수도권과 가깝고 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등이 지나면서 교통의 편의성 때문에 공장 지대가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인구가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면서 앞으로 전통시장이 성장할 여력을 갖추고 있다.

1) 제일시장과 여주5일장

여주를 대표하는 중심 시장은 여주5일장이다. 여주5일장은 과거 여주 읍내장의 명맥을 잇는 전통시장으로 5, 10일이 장날이다. 여주5일장은 주변의 양평시장이나 이천시장보다 규모가 크고, 경기도에서 성남 모란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정기시장이다.

여주5일장이 언제부터 개설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부터 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것이 조선시대에 여주 읍내장이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에 여주5일장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여주5일장에서 거래되는 주요 품목은 쌀과 고추, 마늘, 참깨, 채소 등의 농산물이다. 그 밖에도 의류와 어류, 그릇, 잡화 등 다양한 품목들이 거래되고 있다.

노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골목

노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골목

마늘을 무더기로 쌓아놓은 노점

마늘을 무더기로 쌓아놓은 노점

콩물, 칼국수, 묵, 두부 등을 파는 노점

콩물, 칼국수, 묵, 두부 등을 파는 노점

 
 

여주5일장이 개설되는 곳은 여주의 유일한 상설시장인 제일시장 주변이다. 여주의 중심 상권으로, 장날에는 차 없는 거리가 되는 중앙로와 이어져 있다. 지금도 장날이면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활력이 넘친다.

여주5일장 본문 이미지 1

닭 장수가 손님이 고른 닭을 잡아 올리고 있다.

의류와 신발을 가지런히 걸어놓고 펼쳐놓은 노점

의류와 신발을 가지런히 걸어놓고 펼쳐놓은 노점

 
 

장날에는 오전 8시부터 여주군청 별관부터 중앙로에 이르는 도로와 골목에 좌판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중앙로는 상리부터 창리까지 유명 브랜드 점포와 카페 등이 있는 번화가이고, 창리부터 하리까지는 제일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해가 지면 루체비스타의 불빛이 아름답게 반짝이며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루체비스타의 불빛이 반짝일 무렵이면 여주5일장에서는 막판 떨이가 시작되고, 한산했던 장터는 다시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오늘날 여주 지역에는 상설시장이 여주 시내에 있는 제일시장뿐이다. 여주5일장은 제일시장 주변에 개설된다. 제일시장은 1983년에 과거 여주 읍내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제일시장은 면적이 6,616m2에 3동 192개의 점포가 있다.

* 그 밖의 시장
이 외에 여주 지역에는 가남읍의 가남시장과 대신면의 대신시장이 장이 선다. 일제강점기 때 존속했던 금사면의 이포시장은 이포대교가 건설된 이후 장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 후 개설과 폐지를 반복하다가 지금은 유명무실한 상태이다. 또한 2002년까지 점동면에 점동시장이 개설되어 있었지만 여주5일장과 장호원시장이 멀지 않아 교통의 발달과 함께 장세가 약화되어 문을 닫았다.

또한 조선시대에도 있던 점동면의 청안시장은 1980년 전후, 일제강점기 후반에 개설된 북내면의 주암시장과 해방 이후에 생겨난 당우시장은 1970년대 초반에 사라졌다.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여주5일장과 제일시장은 여주 시내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서여주IC에서 나가서 여주시청 방향으로 가면 시내 중심이 나오고, 제일시장을 찾을 수 있다. 장날이면 노점들이 중앙로를 메우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제일시장에서는 다른 시장들과 마찬가지로 농수산물과 잡화, 생활필수품 등을 판매하고, 여주5일장에서는 쌀과 고추, 마늘, 참깨, 채소 등과 같은 농산물과 의류와 어류, 그릇, 잡화 등 다양한 품목들이 거래된다.

칼이며 가위, 바구니, 프라이팬 등의 생활용품을 파는 노점

칼이며 가위, 바구니, 프라이팬 등의 생활용품을 파는 노점

소 코뚜레

소 코뚜레행운을 부른다며 장식용으로 판매한다.

 
북어를 쌓아놓고 파는 노점

북어를 쌓아놓고 파는 노점

생활용품을 파는 노점에 걸려 있는 조롱박

생활용품을 파는 노점에 걸려 있는 조롱박

 
 

6.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여주 지역은 동쪽으로 양평과 강원도 원주, 충청북도의 충주, 서쪽으로는 이천, 남쪽으로는 이천과 음성, 북쪽으로는 양평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인접한 도시의 면면에서 보듯이 경기도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강원도와 충청북도와 인접해 있다.

여주 지역의 북부는 동서로 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여주 중심부로 여러 지방의 지류가 합류하는 한강이 흘러간다. 이 한강변 주위로 비옥한 땅들이 형성되어 있다.

여주의 평야는 규모가 크지 않다. 여주평야가 유명해진 이유는 조선 왕실에서 직영으로 벼를 재배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따르면 당시 남한강 유역의 가장 중요한 물자는 쌀이었고, 특히 여주와 이천 일대의 조생종 벼는 시장에 일찍 출하되어 많은 이익을 보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에는 강제로 땅을 빼앗겨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여주 지역은 50% 이상이 임야 지대에 속해 있어 일부 지역에서 쌀농사를 짓지만 밭작물의 생산이 활발한 편이다. 오늘날 여주 지역의 특산물로 자채쌀 외에 고구마와 땅콩, 참외, 배 등이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주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는 대신면의 남한강변과 능서면 일대의 야산 기슭에서 주로 재배가 되는데, 전국 생산의 20%를 차지한다. 여주에서 고구마가 많이 생산되는 것은 수확기에 온도의 차이가 심해 전분 축적이 많고 토지가 배수에 용이한 토질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땅콩 재배도 활발했는데, 여주 지역의 토지가 가뭄에 강한 땅콩 농사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근래에는 외국 땅콩이 다량 수입되면서 재배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농약을 쓰지 않고 재배한 데다 맛과 영양이 뛰어나 아직도 여주 땅콩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여주배는 근래에 들어 새로운 특산물로 부상했다. 배를 생각하는 모임인 이목회를 중심으로 품질 개량을 통해 품질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현재 외국으로 수출하는 품목이 되었다.

여주가 자랑하는 특산물 가운데 하나는 도자기이다. 여주 도자기는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기부터 생산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0년대에는 5개의 생활 도자기 공장이 세워졌고, 그 후 1970년대에는 40여 곳, 1980년대에는 100여 곳으로 증가, 오늘날에는 약 600여 곳에 도자기 공장이 있다.

이렇게 여주 지역에서 도자기가 많이 생산되고 있는 것은 대신면과 여주읍 경계에 있는 싸리산을 중심으로 점토와 백토, 고령토 등 뛰어난 도자기 원료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여주도자기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2년에 현재 시가로 약 15억 원에 이르는 제품을 생산했을 정도로 꾸준하게 명맥을 잇고 있다.

신륵사 관광지에서는 매년 여주도자기축제가 개최된다. 1990년부터 개최된 여주도자기축제와 세계도자비엔날레 등을 통해 여주 지역은 국내 굴지의 도자기 생산지로 확고한 입지를 갖추고 있다.

여주는 수도권에서 가까워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여주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남한강과 남한강변에 위치한 신륵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세종과 효종의 왕릉, 고달사지 같은 절터 등이 손꼽힌다.

신륵사는 신라 때 고승이었던 원효가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륵사는 전국의 절 가운데 드물게 강변에 지어진 사찰이다. 신륵사는 강변에 있어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으로도 유명하다. 절 뒤편으로 숲이 우거지고, 앞에는 강변에 암벽이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빚어낸다.

세종대왕릉은 넓은 잔디밭과 오래된 소나무들이 많고, 세종전 뜰에는 측우기와 자격루 등 세종 연간에 발명한 과학기술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목아박물관은 전통 목공예와 불교미술을 특화시켜 1989년에 세워진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전체적인 모습이 인도의 석굴사원을 본떠서 만들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강길 걷기 코스로 장터 길을 알려주는 알림판

여강길 걷기 코스로 장터 길을 알려주는 알림판여주로 흐르는 남한강 길을 여강길이라 부른다.

7. 먹을거리

여주5일장의 먹을거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올갱이국수이다. 올갱이국수를 파는 시장은 다른 지역에도 많지만 여주5일장의 올갱이국수는 3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국수이다. 옥수수를 갈아서 만든 올갱이국수는 면이 굵고 짧아 젓가락 대신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하는데, 진한 국물이 일품이다.

또한 여주 지역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여주쌀과 고구마를 대형 무쇠솥에 넣고 밥을 지어 각종 고명을 얹어 먹는 비빔밥과 쌀밥정식도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여주생활도자관 주변의 참숯마을에서는 숯가마 찜질을 할 수도 있다. 가마에서 숯을 빼면서 부삽에 고기를 얹어 구워 먹는 ‘3초삽겹살구이’도 별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주5일장 (국내 시장백과, 이경덕, 박재영, 가디언 출판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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